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뭔가를 기억하는 게 아주 피곤할 정도인데, 다만 흐름이 있는 것은 잘 기억한다. 이야기, 역사 같은 부류들 말이다. 이름자가 그 사람과 무슨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은 가장 외기가 어렵다. 몇 해를 친하게 지낸 사람의 이름도 종종 더듬거리고 만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내가 이 책을 작가님의 이름 덕에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세랑 작가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개의 팟캐스트에서 만났다. ‘영혼의 노숙자서늘한 마음 썰인데, 바탕은 비슷해도 색채가 다른 곳이다. ‘영혼의 노숙자는 불편하지 않은 웃음을, ‘서늘한 마음썰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내를 말하는 곳이다. 두 곳 모두에서 작가님은 본연의 색을 유지한 느낌이었다. 작가님 특유의 어조가 좋았다. 처음에는 툭, 빠르게 말을 열고 중간에 급작스럽게 느려지는 말투. 마치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아이 같은 말투라 듣는 내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는 담백하고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느껴졌고, 그가 말하는 작품 역시 그런 느낌이었기에 그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도서관에서 정세랑 작가님의 책을 찾을 때 놀란 것은, 이미 많은 책이 대출 중이고 예약까지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이다. 문단 내 성폭력에 목소리를 높이는 도덕적인 작가님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인지, 그저 작품 자체가 좋아서인지 호기심이 들었다. 어렵사리 남은 몇 개의 책을 빌려왔는데, 가장 먼저 꺼내 든 것은 <옥상에서 만나요>라는 작품이다. 책의 내용은 그를 글로 풀어낸 듯 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해피 쿠키 이어이혼 세일이었는데 담담하지만 목적지가 확실한 문체와 신선한 발상이 섞여 재미있었다. 중동에서 온 의대생이 사고로 귀의 일부를 잃고, 없어진 귀가 과자로 재생되는 이야기. 오래 된 친구들에게 이혼으로 쓸모 없어진 물건을 판매하는,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늘 유행을 이끌던 여자의 이야기. 굳이 다른 작가와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에 우유를 잔뜩 넣고 머그컵에 담아 오후즘에 홀짝이는 느낌이었다. 일상적이지만 비일상적인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그걸 판타지라 말하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기적으로 묘사하고 싶다. 그의 글은 까끌거리는 부분이 없어 부드러웠고, 너무 조심스러워 재미를 잃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SNS에서 정세랑 작가님의 팬을 자처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면에서 그에게 매료되었을까 궁금했다. 나는 그의 수많은 작품 중 이제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바로 짐작이 가능했다. 초반부터 독자를 휘어잡는 강렬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흐릿한 작품도 아니다. 묘사하자면 철사가 든 굵은 연노랑 털실이라고 말하겠다.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심지가 있다.

  원래 내가 책을 고를 때는 아주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평론가의 글도, 지인의 추천도, 베스트 셀러 순위도 내게는 영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SNS에 간혹 보이는 진심 어린 감탄의 문장들, 표지 뒷면에 있는 한두문단의 글이 나를 읽게 만든다. - 잠시 논지를 벗어나자면 그런 이유에서 요즘 출판계에 불만이 많은데, 내가 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뒤표지에 글을 실은 책이 많았다. 아니면 하다못해 한두문장의 카피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표지에 제목과 저자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책들이 꽤 많다. 나는 시간이 많아 모든 책을 훑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 데나 펼쳐 그 부분만 읽고 고르기에는 내가 읽은 부분이 핵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뒤표지에 적힌 글이야말로 책을 통과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책은 찝찝한 기분으로 내려놓게 된다. 그런 면에서도 <옥상에서 만나요>는 만족스러웠다. – 뒷표지에 거창한 카피 대신 이언희 감독님의 평이 실려있다. 책을 읽고 나니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정세랑의 다정함’이 한 번에 이해되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부담스럽지도, 제 딴엔 다정이라지만 외롭지도 않은 다정함. 언뜻 보면 무감한 행동에 깊숙이 베여있는 다정함.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다정함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열의가 넘쳐흐르는 만화 주인공보다 늘 웃기만 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정보를 주는, 이리저리 뛰는 주인공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인물을 좋아했다. 늘 그런 사람이 되고자 부던히도 노력했다. <옥상에서 만나요>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다정한 재미. 기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앞으로도 그와 그의 작품을, 털실 속에 숨겨진 철사를 응원하겠다. 정말 그녀가 문화부 장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백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P.S.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문단 내 심각한 불평등을 직면하기위해 등단을 결심하고, 등단을 해낸 점에서 이미 매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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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일론 4월호 스트릿 기사를 개제한 류용현 에디터를 비판합니다.

 평소 나일론의 문체답고 서정적인 기사와 인터뷰를 사랑하고 자랑하던 독자 중 한명입니다. 어떤 잡지를 살지 고민하는 지인들에게는 서슴없이 '나일론'을 추천하던 제가 4월호를 읽은 지금, 저를 믿고 잡지를 구매하고 구독하던 지인들에게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4대 패션쇼의 스트릿 패션을 취재한 기사가 문제였습니다. 스트릿 패션의 가벼움과 젊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레이아웃과 코멘트, 분위기 모두 다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즐겁게 읽어나가던 글이 중반부 부터 제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실껍니다. 조금만 튀는 패션으로 나서도 따라붙는 시선과 말들. 그것이 여성일 경우에는 정도가 과격한 일이 허다했습니다. 저 역시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숱하게 길에서 겪어온 '이성의 잣대'를 본 기사에서 느꼈습니다. 아주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부터 정확히 류용현 에디터가 작성한 기사였습니다.
"은근한 섹시미를 강조한 여인. 하지만 제 눈엔 아닌 것 같아요."
"딱 제 이상형입니다!"
"본인이 애연가이기 때문."
 이 외에도 사진으로 추측하는 멘트들은 그 에디터가 남성임을 인지하기 전부터 길에서 던지는 추파와 같이 깊이가 없었습니다.
 나일론이 추구하는 패션은 무엇인가요? 각자가 원하는 옷, 원하는 무드를 연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닌 획일화되고 유행에 맞는 패션만 추구하십니까? 아니라면 이는 패션 뿐 아니라 기사의 멘트에도 주의를 요구해야하는거 아닐까요? 다양함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내가 좋아하고,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기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고려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류용현 기자의 코멘트는 전혀 독자들에게 도움도 즐거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과반수가 여성으로 구성된 나일론 사측에서 이러한 내용에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은 것도 사실 놀랍습니다.
 혹여 에디터가 남성이라서 제가 이 멘트에 불쾌해한다는 생각이 있으시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처음엔 에디터의 성별을 모른채로 읽어내려갔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미투를 지지하는 기사와 젠더감수성이 없는 기사가 공존하는 나일론에게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당신들에게 미투운동과 같이 최근 사회에서 각광되는 운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의 매거진이 가져야할 무게감 조차 지니지 못한 4월호의 나일론은 그야말로 실망이었습니다. 나는 이 글을 4월호를 구매한 즉시 썼다가 나 스스로 감정적이고 무이성적으로 썼을까 고려해 퇴고하여 지금 게시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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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를 꿈꾸는 학도로써, 보그의 21주년 8월호를 사지 않을 수 없다.
두산매거진의 탄탄한 바탕은 보그가 21주년 동안 '보그다움'을 만들고 유지시키는데 큰 힘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특별하고 소중한 부록을 위해 얇게 제작될 수 밖에 없었던 표지의 재질에 받는 순간 웃음이 났다. 늘 여유롭고 체에 거른 모래처럼 걸림없게 느껴져 '잘사는 언니'같은 느낌에서 한계단 내려온 것 같달까.
잡지의 재질과 여유없는 타이핑은 늘 내게 아쉬움이자 안타까움이였다. 21세기가 되도록 빳빳하고 광택나지만 화학적 냄새가 나지 않는 제지가 개발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번 보그의 8월호는 유기적이였다. 하나의 큰 책을 보듯, 셀럽과 모델들이 어릴적만든 색종이 고리들처럼 제 색들을 유지하며 하나의 줄을 만들었다. 유아인의 인터뷰잉, 오랜 시간 패션계에 숨쉬던 장윤주, 송경아..
모두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을수도 뺄수도 있는 절묘한 섭외였다.
보그는 과거 - 현재 - 미래순의 한편의 훌륭한 잡지를 만들어냈다.신진 모델이 보그의 표지모델이 된 자신이 프린팅된 옷을 입고 찍은 화보로 보그는 그들이 아닌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 한듯했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는 표지가 만들어 지기에는 '21주년'이라는 묵직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나 싶어 좀 아쉽기도 했다만.
잡지의 오랜 변비같은 문제인 '남자같음'과 '여자같음'은 여전히, 한국어로 할 수 있는 것도 영어로 바꾸고야마는 워딩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상당부분 발전했음은 볼 수 있었다.
가장 마음을 때린 아모레의 1세대 방문 판매원 ㅁㅁㅁ님의 화보.
혁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진부한 혁신일때 최악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인데, 화보는 성공적으로 혁신이였다.
스타일링은 어떤 페이지든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웠고, 텍스트는 한국인 특유의 소심하고 안정적인 추구를 벗어나 꽤 직설적이고 실험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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